06/09/2022
9월 4일 음악평론가이신 어머니께서 본가에서 정기적으로 열고 계신 클래식 모임의 멤버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케이터링을 맡았습니다. 본래 음악을 주제로 하는 모임이지만 이날은 특별히 평양에서 오신 북한이탈주민이시자 유튜브 채널 ‘평양여자나민희’를 운영하고 계신 나민희 님과 김정국 님 부부를 초청하여 귀한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나민희님 부부를 포함하여 말씀으로만 듣던 귀한 손님분들을 직접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이시자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이신 홍세화 선생님은 호주 워킹홀리데이 외국인 노동자 출신이자 택배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했던 제가 무척이나 존경하는 분이기에 매우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모임에 맞게 요리의 테마를 ‘자유, 해방, 화합’으로 정했습니다. 메뉴와 주류를 선정하는데 나민희 선생님이 몰타에서 거주하셨던 점, 홍세화 선생님과 김정국 선생님이 프랑스에 거주하셨던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랑스 요리와 와인을 메인으로 정하고 결에 맞는 다른 메뉴를 선정했네요. (사실 북한 요리를 따라 해볼까도 생각했었지만 나민희님께서 평양 중앙 요리학원에서 공부하신 요리사 출신이셨기에 어설프게 따라 했다가 괜히 실례가 될 것 같아 생각을 접었습니다.😂)
‘화합’이라는 테마에 맞게 모든 요리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보았어요. 처음엔 코스요리를 생각했지만 서빙 인원이 저 혼자뿐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뷔페식으로 차렸습니다. 시간 관계상 음식 사진을 찍어놓지 못해 대신 글로 그날 대접한 요리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깡빠뉴(Pain de campagne)- 장발장이 훔친 빵’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시골풍 빵입니다. 호밀이 들어가 딱딱하고 투박한 맛이 나는데 깡빠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발효빵이라고는 증편과 이탈리아식 피자 도우만 구워봤던 터라 실패할까 봐 매우 걱정했는데 그럴싸하게 구워진 것 같아 다행이네요. 깡빠뉴 만드는 법을 찾아보니 요즘 쓰이는 건조 이스트를 바로 반죽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르방이라는 발효된 밑반죽을 사용하여 옛날 방식으로 굽는다고 하여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밑반죽을 넣어 만들어보았어요. (사실은 건조 이스트도 넣었지만 테마에 맞게 억지로 퓨전으로 만들기 위해..읍..)
빵 두덩이를 굽고 반죽이 조금 남아 미니 사이즈의 깡빠뉴를 만들고 (죄 없는 캐릭터를 도둑으로 만드는) ‘코제트가 훔친 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름의 의미를 설명한 후 한 분께 특별히 드리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설명을 못 드렸네요. 식사가 끝나고 보니 사라진 걸로 보아 다행히 손님분께서 드신 것 같습니다.😆 이름을 알려드렸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코제트가 훔친 빵을 드신 분을 찾습니다. 맛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송화 버섯죽 - 아무래도 한국인들에게 빵과 면만으로 된 식사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것 같아 찹쌀죽을 끓여 스타터로 준비해 봤습니다. 마침 추석선물로 싱싱하고 향기 좋은 송화 버섯이 잔뜩 배달되어 찹쌀과 송화 버섯과 각종 채소를 넣어 끓여봤어요. 익히지 않은 생 버섯을 고명으로 올렸습니다.
3. 그린샐러드 - 비타민, 루꼴라등 각종 푸른잎 채소에 직접 본가에서 키운 방울토마토와 슬라이스한 래디쉬로 색을 더한 후 레몬 갈릭 드레싱을 뿌리고 파르마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갈아 토핑했습니다.
4. 코코뱅(coq au vin) - 장닭을 와인에 졸여 만드는 프랑스 요리입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늙어서 살이 질겨진 닭을 와인에 오랫동안 끓여서 부드럽게 만들어 먹었다고 해요. 저는 질긴 토종닭을 사용했고 부르고뉴 지방의 요리라 본토 사람들은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썼다지만 그 귀한 부르고뉴 피노를 요리용으로 두병이나 쓸 수 없어 저렴한 까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했습니다. 여담으로 요리에 넣을 부케가르니를(요리에 쓰이는 허브 다발) 만들기 위해 마트에 가면 항상 매진이었던 타임을 인터넷에서 주문했는데 모임 전날 도착 예정이라 쓰여 있었으면서 모임 다음날 도착해서 매우 아쉬웠던…🥲
5. 크림소스 골뱅이 요리 -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Escargot de Bourgogne)를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달팽이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입장이라 차마 먹을 수 없어 비슷한 복족류 생물인 골뱅이로 요리를 만들어봤습니다. 본가에서 직접 키운 붉은 고추와 느끼함을 잡아줄 파를 함께 토핑 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췄습니다.
6. 봉골레 파스타(Spaghetti vongole)- 동죽조개에 화이트 와인을 이용하여 술찜을 만드려다가 메뉴에 탄수화물이 부족한 것 같아 스파게티 면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었습니다. 백종원 님이 유튜브에서 소개하신 막걸리를 넣은 술찜을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손님께서 막걸리를 사 오셔서 막걸리와 페퍼론치노 대신 본가에서 키운 고추를 넣고 마늘을 잔뜩 넣어 한국 스타일로 만들어봤습니다.
7. 솔랸카(Солянка) - 토마토소스 국물에 각종 햄과 피클 등을 넣어 만드는 시큼한 러시아식 스프로 러시아 부대찌개로 불린다고 합니다. 기름진 프랑스 음식이 메인이라 새콤한 맛을 더하고 싶었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국물요리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도중 딱 맞는 메뉴를 찾은 관계로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사실 준비한 중국 술에 어울리는 중국음식을 메뉴로 선정했는데 유럽 음식에서 갑자기 중국음식으로 넘어가면 너무 뜬금없을 것 같아 그라데이션을 주기 위해 러시아 음식을 하나 넣어보았습니다.😆 부대찌개와 비슷한 맛이기에 김치도 넣어봤는데 잘 어울려서 다행이었네요.
8. 피단 두부(皮蛋豆腐) - 연두부와 삭힌 오리알을 채소와 함께 잘게 잘라 소스에 버무려 먹는 중국 음식입니다. 간장과 차이나타운에서 산 천추(중국 식초)와 고추기름을 섞어 소스를 만들고 고수를 토핑 했는데 매운 고추기름과 고수 특유의 향을 싫어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장, 파인애플 식초, 참기름을 섞은 소스에 미나리를 토핑 한 한국 스타일 버전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9. 매쉬드 포테이토(Mashed potato) - 서양요리에 곁들여 먹을 탄수화물이 필요할 것 같아 으깬 버터와 크림을 넣고 사워크림을 올린 감자요리도 함께 준비해봤습니다.
주류
1. 샤또 드 크레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Chateau du Cray Bourgogne Pinot noir) - 부르고뉴 지방 요리인 코코뱅과 함께할 부르고뉴 피노 누아로 서래 마을 ‘레드 텅’ 소믈리에 분의 추천을 받아 준비했습니다. 요리사 출신이신 소믈리에분의 견해에 따르면 코코뱅과 어울리는 레드로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보다 다른 지역의 다른 종류의 와인을 곁들이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는데 손님분들 중에 프랑스에서 살다 오신 분들이 계셔서 프랑스 와인을 구매하고 싶고 여러 가지 술을 준비해야 하는 관계로 가성비 좋은 와인을 원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와인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2. 샤또 드 크레이 부르고뉴 샤도네이(Chateau du Cray Bourgogne Chardonnay) - 크림소스 골뱅이 요리와 봉골레에 샤도네이가 어울릴 것 같아 같은 브랜드의 가성비 좋은 화이트 와인을 준비해봤어요.
3. 혁명 소주(革命小酒) - 우리가 아는 그 소주(燒酒)가 아니라 작을 소(小) 자와 술 주(酒)를 합한 글자로 중국의 고량주입니다. 고된 노동이 끝난 뒤 지친 하루를 보상받고자 항상 혼술을 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고량주인 연태꾸냥은 매일 마시기에는 가격이 조금 부담스럽고(얼마나 마시려고…) 저렴한 한국 희석식 소주는 도수가 약하고 뒤끝이 좋지 않아 문제였는데 이 술을 한번 마셔보고는 그 모든 단점을 커버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백주 특유의 향이 나면서 도수가 42도로 적당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제 인생 노동주로 등극하였기에 언젠가 꼭 다른 분들께 소개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테마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해 봤습니다.
4. 백년연태(百年烟台) - 마찬가지로 고량주이지만 도수는 혁명소주보다 조금 낮은 33도로 목 넘김이 부드러운 백주입니다. 와인을 사러 갔던 서래마을에서 동창 커플을 한번 보고 가려고 했는데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보진 못하고 대신 이 술을 선물로 받았네요😄
5. 스페셜 칵테일 ‘코레아 리브레(Corea Libre)’ - 오늘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칵테일로 일명 ‘통일주’입니다. 쿠바가 독립을 위한 전쟁 당시 'Viva Cuva Libre'(자유 쿠바 만세)라는 구호를 사용했는데, 이때 한 미군이 럼에 콜라를 떨어뜨려 마시며 구호를 외친 것에서 유래된 칵테일인 ‘쿠바 리브레(Cuva Libre)’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었습니다. 쿠바 리브레는 쿠바의 술인 럼을 베이스로하여 라임주스와 콜라를 섞고 라임을 가니쉬로 올리는데 럼 대신 북한의 ‘평양 소주’와 남한의 ‘서울의 밤’을, 콜라 대신 직접 만들 수정과를 섞어 곶감대추호두말이를 올렸습니다.
이 칵테일은 특별히 조주 퍼포먼스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큰 원형 유리볼에 얼음을 담고 블루베리즙을 담은(원래 ph 농도를 적당히 맞춰 빨간색과 파란색 주스를 각각 만들어야 했으나 시간 관계상 생략했습니다.) 유리 소주잔 네 개를 세운 뒤 그 위에 백두산과 한라산을 상징하는 초록색 백세주 잔 두 개를 올리고 유리볼 주위에 수정과가 담긴 소주잔 네 개를 놓아 태극기를 형상화하였습니다. 분화구에 해당하는 백세주잔 밑동에 독주를 붓고 불을 붙이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알콜이 날아가서인지 아니면 바람이 세게 불어서인지 불이 붙지 않았네요.🥲
평양 대표로 나민희님이 평양 소주를, 제가 서울 대표로 서울의 밤을 각각의 분화구에 동시에 붓고 다른 분들이 네 잔의 수정과를 부어주심으로써 한데 섞인 술을 손님들께 조롱박으로 따라드리고 남한과 북한의 미니 깃발을 꽂은 고명을 올림으로써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던 통일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이렇게 거창한 퍼포먼스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욕심이 나서 급히 머리를 짜내 개발했습니다.😁 밤을 샌 보람이 있었네요!
부족한 요리 실력에도 모든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시고 칵테일 조주 퍼포먼스에 즐겁게 참여해 주시고 귀한 말씀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손님분들께 매우 감사드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엔 더 좋은 ‘맞이’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리고 인생 술 소개해 준 재혁오빠, 맛있는 와인 추천해 주신 레드텅 서래마을점 소믈리에님 고량주를 지원해 준 지원승범커플, 평양소주를 보내주신 뉴욕 맨하탄 라운드 K 카페의 대표 잡대감님(변옥현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평양소주는 정말 신의 한 수였습니다! 아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주 의미 있게 잘 마셨습니다.😊